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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서 회화전 연 한인 3세 러 작가 아나톨리 김 인터뷰
분류
5
출처
KOFICE(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작성일
2014-10-27

비가 눈으로 변했다. 서설은 아니다. 겨울이 빨리 찾아왔다. 잊고 있었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다. 모스크바다. 며칠 전 첫눈이 내렸다. 일주일 새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다. 가을 정취는 온데간데없다. 오후 5시 30분, 얼마 전까지 젊은이들이 북적댔던 ‘치스트이 불바르공원’도 서늘해졌다. 한국과 비교하자면 서울 종로나 인사동 골목과 비슷하다. 이곳은 주러 한국 문화원(원장 양민종)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러 한국문화원에서는 연중 다양한 한국 문화 행사를 진행하는데 최근 한인 3세 러시아 작가인 아나톨리 김의 회화전이 열리고 있다.

 

아나톨리 김은 카자흐스탄 출신으로 러시아 현대문학계의 중견 작가가 됐다. 그런데 이번 작가전은 소설이 아닌 회화 작품이다. 그림을 그리는 아나톨리 김을 만나러 주러 한국문화원을 찾았다.

최근 아나톨리 김은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 유공 훈장(무궁화장)을 수상했다. 몇 주간 문화원 2층 아리랑 홀에서 전시되고 있는 회화 전 겸 축하연이 10월 22일 마련됐다. 그는 1973년 문단에 데뷔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모스크바예술상을 비롯해 톨스토이문학상 등을 받는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현대 작가 군에 속한다. 아나톨리 김은 고리키문학대학을 졸업한 후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그 전에는 모스크바 미술대학에서 그림을 그리는 미술학도였다.

 

이번 전시회는 그가 일생동안 문학 작품 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작업한 작품들 가운데 40점을 선별했다. 아나톨리 김 작가는 '최초로 관심을 가진 예술 분야는 미술이었다“며 ”내 작품 속에서 추상적이고, 인상파적인 이미지를 자주 엿볼 수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회화에 대한 동경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화 작품의 주를 이루는 것은 연필 드로잉과 수채화다. 회화 작품과 관련 아나톨리 김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내면 심리를 묘사할 때 인물 드로잉을 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소개했다.

작가로 산다는 것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했다. 절망과 고독이 만나는 지점에서 동백처럼 피어나는 시(詩)한 편이 기껏해야 몇 만원으로 환산되는 시대다.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한민족의 혈통을 이어 온 고려인이 모국어가 아닌 러시아어 사고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말이다. 다음은 아나톨리 김 작가와의 일문일답


 

<아나톨리 김(오른쪽 남) 인터뷰>
 
Q. 회화전을 개최했다. 작가로서 잘 알려졌는데 이번 행사를 열게 된 배경에 대해 알고 싶다. 또 미술대학을 다니다가 진로를 문학으로 바꾼 이유는
 
아버지가 러시아어를 전공한 문학 선생님이었습니다. 그의 영향이 컸죠. 9학년 때 모스크바 사범대 출신 교사들이 제가 다니는 학교에 전근을 왔어요. 그분들 밑에서 공부하면서 정신적인 소양을 키웠죠. 그때 문학과 그림을 좋아하게 됐어요. 선생님들의 권유로 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 편집장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됐죠. 대학에서는 화가와 연출가를 배출하는 연극학부에서 공부했어요. 연극 공연을 연습하던 중 휘트먼의 시 한 소절을 듣게 되었죠.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린이가 나에게 한줌의 풀을 가져다주면서 이것이 뭐냐고 물었다. 이 물음 속에서 나는 불멸을 느꼈다.” 손바닥을 쳤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문학이구나. 순간 시가 무엇인지, 그 시가 불어넣는 영혼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어요. 시를 접하면서 문학을 하게 됐고 그건 화가로서의 제 인생을 문학도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죠. 그러나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틈틈이 그렸죠. 표현 방식이 다를 뿐 회화와 문학은 저희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일종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과 문학 사이를 오고갈 때가 많았죠. 펜으로 풀지 못하는 인상은 붓으로, 붓으로 풀지 못하는 영감은 펜으로 풀었어요. 그렇게 창작된 작품들 가운데 몇 점들이 보시다시피 여기(문화원 아리랑홀)에 걸려 있습니다. 

Q. 젊은 시절 어땠나?
 
늘 힘들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웃음). 모스크바에 와서 공사판을 전전했죠. 여러 형태의 막노동을 경험했고 그때의 경험이 제 삶과 문학의 자양분이 됐죠.
 
Q. 작품 ‘다람쥐’로 톨스토이 대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1982년 발표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문단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시절의 숨 막히는 현실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죠. 예술가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Q. 전남 남원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데 춘향전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한국 외국어대 김현택 교수의 부탁이기도 했어요. 그가 초역했고 제가 그 번역했지요. 그 초역을 잃으면서 춘향의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에 푹 빠졌어요. 그림도 많이 그렸답니다. 춘향은 푸쉬킨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주인공을 닮았습니다. 시적인 운율감도 매력적이었어요. 읽을 때 음악처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러시아어 운율에 맞췄습니다.
 
Q. 3세 한인으로서 러시아 문단에서 활동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러시아어로 글은 쓰지만, 나의 정체성은 한국인입니다. 러시아말로 아름다움을 묘사하지만, 한국인의 눈으로 그 아름다움을 바라본다고 하면 맞을 것 같아요. 서양인들은 보통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제 의식은 동양철학 쪽에 가깝습니다. 크리스천이지만 불교적 사고관을 가졌지요. 내 작품의 철학과 미학은 한국인의 정체성에 입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청인사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
 
Q. 자신의 정체성은 작품에서 어떻게 발현되나
 
작가로서 저의 관심사는 인간과 자연(신의 세계)입니다. 인간이 이 세계에 있는 존재 이유. 괴테의 '파우스트'에 보면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되었을 때 바로 죽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끊임없이 이 문제를 놓고 저는 문학과 투쟁하고 있지요. 한국어에서 죽는다는 동사는 ‘돌아간다’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의 순간은 우연이 아니라 수많은 연결고리를 갖고 끊임없이 진행됩니다.
 
Q. 붓이 좋은가, 펜이 좋은가 그림을 그릴 때와 글을 쓸 때 어떻게 다른가?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목표를 두지 않습니다. 피카소 같은 화가의 경우 화폭에 자신을 투영해서 다채롭게 변형-창작한다면 저에게 있어 그림은 개인적인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취미'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나 글은 자아실현을 위해, 그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탐구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오지요.


 


Q. 대통령 무궁화장을 받았다
 
영광입니다. 소비에트 연방국 가운데 하나였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일생을 러시아에서 보냈으니 러시아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1991-1995년까지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국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됐어요. 난 누구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때 내 선조가 김시습인 것을 알았어요. 강릉 김씨였죠, 저는 러시아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조선의 피로 글을 쓰지요. 러시아어로 글을 쓰지만 제 정신과 영혼은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이렇게 큰 상도 받았습니다.
 
Q. 선생님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복수’가 제작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간단히 소개해달라.
 
유명한 러시아 감독이 파벨 추흐라이가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사할린' 고려인의 삶을 다룬 영화죠. 이 작품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줄거리는 고려인 소년이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증오심, 삶과 죽음 등 고려인의 역경을 그린 작품입니다.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파벨 추흐라이 감독은 저희 작품의 특징을 간파했죠. 그에게서 대사보다는 연기를 통해 작품에 근접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체 영화 분량 중 2/3은 사할린서, 나머지는 한국에서 촬영합니다.


※사진출처: 통신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