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소식

마탄사스의 아리랑
분류
5
출처
YTN
작성일
2014-07-23


쿠바 마탄사스 시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

한 때 에네켄 농장이 많이 있던 이곳은 쿠바에 첫 발을 디딘 한인들 삶의 터전이었다.

[인터뷰:루이스 센체 리오스, 마탄사스 시민]
"이곳이 처음으로 한인들이 정착한 마을입니다. 쿠바에 와서 에네켄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한인들이 떠난 자리에는 한인 기념비가 남겨져 있고 후손들이 가끔씩 들러 돌보고 있다.

[인터뷰: 마르타 림, 쿠바 한인 후손 2세]
"(기념비 주변에) 무궁화를 심고 싶어요."

수도 아바나에는 쿠바 최초로 한인 후손 문화원이 개원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인터뷰:안토니오 김, 쿠바 한인 후손 3세]
"이곳에서 8월 15일, 설날, 환갑 행사를 할 수 있어 기쁘고…."

17살 다니엘 군은 외모가 영락없는 쿠바 사람이지만 자신의 뿌리가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있다.

[인터뷰:다니엘 김, 쿠바 한인 후손 5세]
"(학교) 친구들이 중국인이라고 불러도 나는 내가 중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말합니다."

쿠바에 살고 있는 한인 후예들!

고국과 단절된 오랜 세월이 겉모습과 언어를 바꿔 놓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리랑을 기억하는 '꼬레아노' 들이다.

아바나에서 자동차로 2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해변 도시 마탄사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이 해변 도시는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무참히 스러졌고, 그 자리에는 사탕수수와 에네켄 농장이 들어섰다.

'학살'이란 뜻의 '마탄사'가 도시 이름으로 붙여진 것도 이 때문이다.

75살인 마르타 임 할머니는 마탄사스 시내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살고 있다.

마르타 할머니는 한인 후손 2세다.

그녀의 부모는 90여 년 전 질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다른 한인들과 함께 마탄사스에 첫발을 내디뎠다.

마르타 할머니는 대개의 쿠바 한인 후예들이 그렇듯이 우리말이 서툴다.

[인터뷰:마르타 림, 쿠바 한인 후손 2세]
"감사합니다, 저는 마르타 림 김입니다. 한국 이름, 임은희입니다. 저는 쿠바의 한국 사람입니다."

마르타 할머니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국어만 쓰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하지만 9남매를 부양해야 했던 아버지는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힘겨운 삶에 밀려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신경쓰지 못했다.

[인터뷰:마르타 림, 쿠바 한인 후손 2세]
"아버지는 집안에서 한국어만 쓰라고 하셨죠.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어려웠어요. 대부분 학교에서 있었고 아버지는 낮에 중노동을 해 피곤하셔서 일찍 주무셨죠. 우리가 집안에서 한국어를 쓸 시간은 거의 없었어요."

한국어는 잘 몰라도 마르타 할머니는 자신이 한인 후손임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쿠바 한인들의 이민사를 담은 '쿠바의 한국인들' 을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쿠바의 한국인들'에는 고단한 삶 속에도 한인으로서 긍지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민자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또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며 푼푼이 모은 독립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낸 이야기 등 이역만리 먼 조국에 대한 한인들의 그리움도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인터뷰:마르타 림, 쿠바 한인 후손 2세]
"내 아버지, 임천택."

'쿠바의 한국인들'은 아버지가 남긴 38쪽 분량의 '쿠바 이민사'가 바탕이 됐다.

이제 빛바랜 '쿠바 이민사'는 마르타 할머니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약하며 한푼 한푼 뱃삯을 모았던 마르타 할머니의 아버지는 결국 죽어서 그 꿈을 이뤘다.

아버지는 독립 유공자로 인정돼 그의 유해는 지난 2004년 그토록 그리던 고국 품에 안겼다.

[인터뷰:마르타 림, 쿠바 한인 후손 2세]
"적어도 당신의 유해는 돌아갈 수 있었어요. 나에게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이죠. 신은 복잡하고 어려운 존재지만 적어도 우리 아버지의 소원을 이뤄주었어요. 참 감사한 일이죠."

어느덧 마르타 할머니는 기억 속의 아버지만큼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됐다.

할머니는 가끔씩 아버지가 생각날 때면 아버지가 사랑했던 조국의 민요를 흥얼거린다.

[인터뷰:마르타 림, 쿠바 한인 후손 2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마르타 할머니에게 조국과 핏줄은 어떤 의미일까?

[인터뷰:마르타 림, 쿠바 한인 후손 2세]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곧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아니에요. 한글학교에 다니는 청년들, 한글을 배우고자 노력하는 청년들 이들이야말로 한국인의 후손이에요."

지난 1921년 3백여 명의 한인들이 멕시코를 떠나 쿠바 마나티 항구에 도착했다.

이들은 주로 에네켄과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쿠바에서의 힘든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쿠바 경제가 어려워지고 농장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으면서 한인들은 새로운 직업을 찾아 아바나와 마탄사스, 카르데나스 등 쿠바 전역으로 흩어졌다.

지금 쿠바에 있는 한인 후손은 1,100여 명, 순수 한국계 혈통은 80여 명이 남아있다.

안토니오 김 할아버지는 한인 후손 3세다.

아바나에 있는 그의 집 구석구석은 하회탈과 부채 등 한국을 그리는 그의 애틋함이 배여 있다.

[인터뷰:안토니오 김, 쿠바 한인후손 3세]
"한국 태극기 한국 부채, 여기가 나와 내 아내의 방입니다. 우리 침대이고 저것이 한국 태극기이고 한국 전통 탈…"

[인터뷰:안토니오 김, 쿠바 한인후손 3세]
(한국에서 가져왔어요?)
"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조부모로부터 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자랐다.

어린 안토니오가 들은 한국은 멀지만 아름다운 나라였다.

무심한 세월에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렸지만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당시 조부모가 해준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인터뷰: 안토니오 김, 쿠바 한인 후손 3세]
"할머니는 '할머니'라고 불렀고, 할아버지에겐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이분들이 우리에게 (우리는 한국인이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늘 한국에 대해 말씀하셨고 애국가를 가르쳐주셨죠. '동해물과 백두산이~' 어릴 때부터 배웠어요."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어머니로부터 김치와 장조림 같은 한국 요리를 배웠다.

덕분에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식탁에는 늘 한국 음식이 빠지지 않는다.

[인터뷰:안토니오 김, 쿠바 한인 후손 3세]
"라면 먹겠소? 나중에 김치 국물은 넣어서 먹으면 더 맛있어요."

쿠바에서 태어나고 자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한국적인 것을 고집스럽게 지키려 했다.

[인터뷰:세라 김, 안토니오 김 아내]
"당연히 한국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한국 음식 같은 것, 한국인들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고 가족 전통을 잘 지킵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지난 2006년부터 쿠바 한인 후손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집은 한인 후손회 임원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하는 사랑방 역할도 한다.

오늘 모임은 쿠바에 있는 한인 후손들의 지역별 명단을 다시 점검하기 위해서다.

소수 민족의 친목단체를 인정하지 않는 쿠바에서 한인 후손회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터뷰:안토니오 김, 쿠바 한인 후손 3세]
"지역마다 인구조사를 해야 합니다. 혹시 사망자가 나오면 지역 대표자가 그 이름을 지우고 나에게 연락하면 내가 그 이름을 지웁니다. 이런 식으로 쿠바에 사는 한인 후손 인구 기록을 유지하고 있어요."

아바나 시내 주택가에 있는 한 아담한 건물.

다음달 개원을 목표로 한인 후손 문화원이 내부 공사 중이다.

당초 계획보다 공사가 늦어져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속은 타지만 그래도 그의 표정은 밝다.

곧 문화원이 문을 열면 한인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오늘은 멀리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멕시코 한인 동포들이 문화원 내부에 전시할 한복과 사진 액자 등 귀한 소품을 챙겨 온 것이다.

한인 후손 문화원 개원에는 멕시코 등 중미 지역 동포들의 도움이 컸다.

동포들은 문화원 건물을 구입하기 위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았다.

[인터뷰:오병문, 민평통 중미·카리브 지역 협의회 회장]
"(문화원 개원 소식에) 안토니오 한인 회장님은 감동을 받아서 정말 눈물을 흘리고 그럴 정도로 기뻐하셨죠. 쿠바의 한인 후손들이 모여서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장소를 마련해주자 하는 게 계기가 됐습니다."

문화원 개원 작업에는 한인 후 2세, 3세, 4세가 세대를 뛰어넘어 힘을 합치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하나 둘씩 소중한 결실을 맺고 있다.

쿠바 중서부에 있는 카르데나스 지역.

쿠바에서 가장 많은 322명의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살고 있다.

카르데나스에 있는 한인 후손들은 다른 지역보다 단합이 잘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 취재진이 온다는 소식에 20여명의 후손들이 아델라이다 김 할머니 집에 모여 취재진을 제식구처럼 반겼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태극기 앞에 후손들이 둘러 앉았다.

4살 꼬마 장미에서 66살의 아델라이다 김 할머니까지..

이렇게 함께 모일 때면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가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은 같은 핏줄, '한인의 후예'라는 것이다.

[인터뷰:아델라이다 김, 쿠바 한인 후손 3세]
"우리 커뮤니티가 자랑스러워요. 우리는 늘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집니다. 쿠바에서 태어난 한인 후손이에요. 카르데나스 커뮤니티는 우리 조상에 대한 생각이 강해요."

카르데나스에서는 3대가 모여 함께 사는 후손들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70대 연년생 자매인 안헬라 장 김과 로사 장 김도 아들 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자매의 부모님은 초기 한인 이민자 대부분이 그랬듯이 자녀가 한국인과 결혼하길 원했다.

하지만 주변에 한인 후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쿠바인과 결혼했지만 그녀들에게는 자랑스런 한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인터뷰:로사 장 김, 쿠바 한인 후손 2세]
"내 피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국 문화 아래서 자랐어요. 부모님은 한국말을 하셨는데 우리는 말은 못해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죠."

때마다 담그는 김치는 이제 쿠바인 며느리도 즐겨먹는 음식이 됐다.

최근에 한국 드라마에 푹 빠진 며느리는 한글 공부도 시작했다.

[인터뷰:주스레이디 레르난데스 디스코, 한인 후손 가족]
"한국 음식이 맛있어요. 우리 집에는 늘 김치가 있어요. (한국 문화는) 쿠바 문화와 다른데 참 재밌어요. 나는 한글 배우는 것도 정말 좋고, 내가 꼭 한인 후손 같아요."

열여섯살 손녀 차벨리가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설날과 추석 같은 한인 후손 행사 때 입었던 이 한복은 차벨리가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옷감으로 만들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국적 눈매가 영락없이 쿠바사람이지만 한복을 입은 자태는 여느 한국 소녀 못지않다.

[인터뷰:차벨리 페르난데스, 쿠바 한인 후손]
"젊은 후손들이 행사 때 한복을 입는데 옷을 입으면 정체성이 더 확실해져요. 우리 할머니나 증조 할아버지도 한복을 입었을 게 상상되고요. 기분 좋고 자랑스러워요."

할머니와 피부색과 생김새도 다르지만 손자 요나단도 한 번도 자신이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인터뷰:요나단 페레난데스, 쿠바 한인 후손]
"스스로를 한인 후손으로 생각합니다.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후손 행사에 참여합니다. 우리 할아버지,할머니, 한인 행사를 통해 한국인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금의환향의 부푼 꿈을 안고 쿠바로 건너온 한인들!

그들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 후손들은 90년이 넘는 세월의 강을 따라 쿠바 속 한인으로서의 삶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불렀던 아리랑은 이제 후손들의 입을 통해 한국인의 자긍심과 뿌리를 상징하는 가락으로 전해지고 있다.